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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

by 도그데이1003 2025. 4. 18.

김시스터즈의 데뷔 무대는 1953년 미 8군 부대에서 이루어졌다. 원래 멤버는 이난영의 세 자녀인 영자와 애자, 숙자로 결성되려 하였으나, 데뷔하는 과정에서 맏언니였던 영자가 빠지고 조카인 민자가 들어오게 된다. 그렇게 세 명은 1959년 미국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그렇게 미국에서 성공해 설리번 쇼에도 22번 출연하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주급으로 1만 5천달러를 받으면서 생활하는 김시스터즈에 이어, 1961년에는 맏아들 영조를 제외한 영일, 상호, 태성이 각각 영일, 영호, 영성이라는 예명으로 김보이즈라는 그룹으로 활동하게 되어 미국으로 가게 된다. 이난영은 남편인 김해송을 잃었고, 자녀들도 미국으로 가 외로움과 쓸쓸함은 배가 된다. 그런 이난영은 명동에서 신카나리아가 운영하고 있었던 카나리아다방을 자주 가게 된다. 옛 동료들이 늘 있었기 때문인데,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은 이곳에서 나왔다. 1957년에는 동료 가수였던 고복수의 은퇴 공연이 성사하게 치루어지면서 이난영도 그곳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게 된다. 이난영은 그날 목포의 눈물 1절과 3절을 불렀는데, 3절에 와서는 그동안의 설움이 터지며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하게 되고, 그 때 부른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중 최고의 절창으로 뽑히고 있다.